대학교 합창부실 한쪽 구석, 볕이 잘 들지 않아 늘 서늘했던 그곳엔 선배들이 물려주고 간 악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습니다. 그날따라 새로운 노래에 목말랐던 저는, 먼지를 뒤집어쓴 채 꽂혀 있던 낡은 악보책 한 권을 무심코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오래도록 함께 할 명곡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악보의 제목은 '비가(悲歌)'. 그 슬픈 한자 제목 옆에, 누군가 펜으로 삐뚤빼뚤하게 써놓은 '맛있는 과자류'라는 낙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마 '비가'라는 발음이 어떤 과자 이름을 떠올리게 한, 이름 모를 선배의 썰렁한 농담이었겠죠. 그 부조화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웃음도 잠시, 악보의 첫 장을 넘긴 순간 공기마저 무거워지는 듯했습니다. 그곳에는 장난스러운 낙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없이 장엄하고 깊은 절망을 담은 5선보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 글은, '맛있는 과자류'라는 엉뚱한 이름표로 제게 다가왔던 한국가곡 '비가(작시 신동춘, 작곡 김연준)'와의 운명적인 첫 만남에 대한 상세한 기록입니다.
'비가'의 두 기둥: 절망을 노래한 시인과 비극을 완성한 작곡가
이 위대한 곡은 한국 예술계의 두 거장이 만나 탄생했습니다. 시와 음악, 어느 한쪽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완벽한 결합의 결과물이죠.
'빛의 소멸'을 노래한 시인, 신동춘
먼저 이 노래의 뼈대가 되는 시를 쓴 신동춘 시인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의 시 '비가'는 세상의 모든 빛나는 것들이 스러져가는 처절한 상실의 과정을 그립니다. 단순히 '슬프다'고 말하는 대신, '태양'이 숨지고 '노을'이 사라지며, 마지막 희망이었던 '별'마저 '아침 이슬'처럼 허무하게 소멸하는 이미지를 통해 독자가 슬픔을 눈으로 보고 느끼게 만듭니다. 이러한 감각적인 묘사는 듣는 이의 가슴을 더욱 깊이 파고듭니다.
교육자이자 예술가, 김연준의 웅장한 음악 세계
한양대학교 설립자이자 한국 가곡의 아버지. 작곡가 김연준(1914~2008)은 이 비극적인 시에 영혼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는 교육자로서 대중과 소통하려는 마음과 예술가로서의 깊이를 동시에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음악은 결코 난해하지 않으면서도, 한없이 웅장하고 드라마틱합니다. '비가'에서는 마치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듯한 선율로, 듣는 사람이 슬픔에 저항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리는 압도적인 힘을 보여줍니다.
가사 한 줄 한 줄에 담긴 의미: '비가' 심층 분석
'비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그 뼈대가 되는 가사를 깊이 음미해야 합니다. 각 연에 담긴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비가(悲歌)
작시: 신동춘 / 작곡: 김연준
아, 찬란한 저 태양이 숨져버려 어두운 뒤에
불타는 황금빛 노을 멀리 사라진 뒤에
내 젊은 내 노래는 찾을 길 없는데
들에는 슬피 우는 벌레 소리뿐이어라
별같이 빛나던 소망 아침 이슬 되었도다
1연: 상실의 서막 - 절대적 존재의 소멸
노래는 '태양'과 '노을', 즉 세상의 가장 밝고 뜨거운 존재들의 죽음으로 시작됩니다. 이는 단순히 해가 지는 풍경이 아닙니다. 내 삶을 지탱하던 가장 절대적인 희망, 신념, 혹은 사랑하는 존재가 사라져 버린 거대한 상실의 선포입니다. 김연준 작곡가는 이 부분을 장엄하고 무거운 화성으로 표현하여 거부할 수 없는 절망의 시작을 알립니다.
2연: 자아의 붕괴 - 내면의 빛을 잃다
외부의 빛이 사라지자, 그 영향은 곧바로 나의 내면으로 향합니다. 나의 정체성이자 생명력인 '젊음'과 '노래'마저 길을 잃습니다. 세상이 어두워지자 나조차 길을 잃은 것이죠. 유일하게 들리는 것은 '슬피 우는 벌레 소리'. 이 소리는 나의 슬픔을 대변하는 듯하지만, 동시에 나의 존재가 한낱 미물과 다를 바 없이 미약해졌음을 암시하며 공허함을 극대화합니다.
3연: 절망의 완성 - 마지막 희망의 증발
그럼에도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던 마지막 희망, 바로 '별'입니다. 하지만 그 소망마저 아침이 오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아침 이슬'이 되었다고 노래합니다. 이 마지막 구절은 모든 것이 끝났다는 비극적 현실을 확인사살하며, 듣는 이에게 한 줄기 희망조차 허락하지 않는 완전한 절망의 세계로 이끕니다.
이처럼 깊은 의미를 알고 악보를 다시 보니, '맛있는 과자류'라는 낙서가 오히려 이 곡의 비극성을 더욱 강조하는 역설적인 장치처럼 느껴졌습니다.
'비가'에 대해 자주 묻는 질문 (FAQ)
- Q1: '비가'는 어떤 시를 가사로 사용했나요?
A1: 신동춘 시인의 시 '비가(悲歌)'를 가사로 사용했습니다. 세상의 빛나는 것들이 사라져가는 과정을 통해 희망과 젊음의 상실을 노래한 비극적이고 아름다운 시입니다. - Q2: 작곡가 김연준은 어떤 사람인가요?
A2: 백남(白南) 김연준(1914~2008) 선생은 한양대학교 설립자인 위대한 교육자이자, '청산에 살리라', '무곡' 등 주옥같은 명곡들을 남긴 한국 가곡의 아버지입니다. 그의 음악은 서양의 낭만주의를 바탕으로 한국적인 정서를 웅장하게 표현한 것이 특징입니다. - Q3: '비가'는 주로 어떤 분위기의 곡인가요?
A3: 전체적으로 매우 느리고(Andante), 무겁고(Pesante), 비장한(Grave) 분위기의 곡입니다. 개인적인 슬픔을 넘어선 거대한 비극을 다루는 듯한 웅장함이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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