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도 모르라고
- 김동환 시
떡갈나무 숲 속에 졸졸졸 흐르는
아무도 모르는 샘물이길래
아무도 모르라고 도로 덮고 내려오지요.
나 혼자 마시곤 아무도 모르라고
도로 덮고 내려오는 이 기쁨이여.
'국경의 밤'의 시인, 김동환의 문학 세계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 1901~1958 추정)은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시인입니다. 1901년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 도요(東洋)대학 영문학과를 중퇴하고 귀국하여 언론인이자 시인으로 활동했습니다.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것은 1925년 발표한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이었습니다. 압록강 국경지대를 배경으로 유랑민의 비극적인 사랑과 삶을 노래한 이 작품은 당시 문단에 큰 충격을 주며 그를 '민족 시인'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김동환의 시 세계는 크게 두 가지 축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국경의 밤'처럼 민족의 역사적 비애와 현실을 담아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산 너머 남촌에는', '봄이 오면' 그리고 '아무도 모르라고'처럼 향토적이고 서정적인 세계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특히 그의 서정시들은 자연에 대한 깊은 관찰과 순수한 감성을 간결하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표현하여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라고'는 그의 이러한 서정성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 중 하나로, 짧은 형식 안에 자연과의 교감, 그리고 비밀스러운 개인의 기쁨이라는 보편적 감정을 완벽하게 담아냈습니다.
'아무도 모르라고' 시에 담긴 순수함과 향토성
가사를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떡갈나무', '숲 속', '샘물'과 같은 시어들은 매우 구체적이고 토속적인 이미지를 불러일으킵니다. 이는 도시 문명과는 거리가 먼, 자연 그대로의 순수함을 상징합니다. '졸졸졸'이라는 의성어는 청각적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마치 독자가 그 숲속에 함께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시의 백미는 단연 '도로 덮고 내려오는' 행위의 반복입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모르는 샘물이길래'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덮고, 두 번째는 '나 혼자 마시곤' 그 기쁨을 독점하기 위해 덮습니다. 이 미묘한 차이는 시의 감정을 점층적으로 고조시킵니다. 발견의 기쁨에서 소유의 기쁨으로, 그리고 그 비밀을 간직하는 충만함으로 이어지는 감정의 흐름이 매우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행 '도로 덮고 내려오는 이 기쁨이여'는 감탄형으로 마무리되며,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을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합니다.
지휘봉을 든 작곡가, 임원식의 음악 여정
임원식(林元植, 1919~2002)은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한국 서양음악사의 1세대를 대표하는 거장입니다. 일본 동경음악학교에서 작곡과 지휘를 공부하고, 해방 후에는 고려교향악단(현 서울시립교향악단)을 창단하는 등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이후 미국 줄리어드 음대에서 지휘를 더 공부하고 돌아와 KBS 교향악단, 인천시향, 대구시향 등 수많은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역임하며 한국 오케스트라의 수준을 세계적으로 끌어올렸습니다.
그는 지휘자로서 더 널리 알려졌지만, 뛰어난 감각을 지닌 작곡가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서양 음악의 기법 위에 한국적인 정서를 절묘하게 녹여낸 것이 특징입니다. 특히 한국 가곡에 대한 애정이 깊어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겼는데, '아무도 모르라고'는 그의 대표적인 가곡 중 하나입니다. 그는 시가 가진 본연의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음악을 통해 그 감성을 증폭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시의 감성을 증폭시키는 음악적 장치들
임원식의 멜로디는 김동환의 시처럼 매우 간결하고 소박합니다. 그는 화려한 기교 대신 시의 순수함을 살리는 데 집중했습니다. 곡의 시작 부분, 피아노 반주는 '졸졸졸' 흐르는 샘물 소리를 섬세하게 묘사합니다. 스타카토로 연주되는 짧은 음형들은 맑은 물방울이 톡톡 튀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성악가의 멜로디는 큰 도약 없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어, 마치 나지막이 비밀을 속삭이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특히 '도로 덮고 내려오는 이 기쁨이여' 부분에서 멜로디는 살짝 상행했다가 부드럽게 하강하며, 내면에서 차오르는 벅찬 기쁨과 그것을 조심스럽게 갈무리하는 마음을 동시에 표현합니다. 임원식의 음악은 시의 행간에 숨어있는 감정의 결을 하나하나 살려내어, 우리를 시인의 마음에 온전히 동화되게 만듭니다. 시와 음악이 이토록 완벽하게 하나가 된 예는 흔치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