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 이야기 69 | 사랑 | 📜 가사 완전정복: 이은상 시, 홍난파 곡 '사랑' - 탄생과 해석 | 한국인의 애창가곡 100선

하나의 시가 음악을 만나 불멸의 생명을 얻는 순간이 있다. 노산 이은상의 절창(絕唱)은 난파 홍난파의 선율을 타고 시대를 건너뛰어 21세기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가곡 '사랑'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한 시대의 정신과 두 예술가의 혼이 오롯이 각인된 예술적 결정체다. 그 탄생의 배경과 시어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를 깊이 들여다본다.

 

✒️ 노산 이은상: 시조에 현대를 입힌 언어의 마술사

노산(鷺山) 이은상(1903-1982)은 가람 이병기와 함께 현대 시조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낡은 형식이라 여겨지던 시조에 현대적인 감각과 섬세한 서정을 불어넣어 대중에게 다시 사랑받는 장르로 부활시켰다. 그의 시는 유려한 리듬감과 음악성을 지녀 수많은 작곡가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 '가고파'와 '옛 동산에 올라'의 시인

'내 고향 남쪽 바다'로 시작하는 '가고파'나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로 시작하는 '옛 동산에 올라' 등, 그의 대표작들은 발표되자마자 노래로 만들어져 전 국민의 애창곡이 되었다. 이는 그의 시가 얼마나 음악과 친화적인지를 증명한다. 그는 민족의 정서와 자연의 아름다움, 그리고 인간의 보편적 감정을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는 시어로 빚어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그의 생애 후반기는 친일 및 친독재 논란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이러한 역사적 평가는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 복합적인 시각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가 가진 문학적 성취와 한국 가곡 발전에 끼친 영향력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가곡 '사랑'의 시어 분석: 불꽃의 언어

가곡 '사랑'의 가사는 짧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폭발적이다. 이 시는 사랑의 본질을 '완전연소'라는 개념으로 정의한다.

탈대로 다 타시오

타다 말진 부디 마소

타고 다시 타서 재 될 법은 하거니와

타다가 남은 동강은 쓸 곳이 없느니라


반 타고 꺼질진대 애제 타지 말으시오

차라리 아니 타고 생나무로 있으시오

탈진댄 재 그것조차 마저 탐이 옳으니라

 

'타다 남은 동강'은 이도 저도 아닌 상태, 미련과 후회로 얼룩진 관계를 상징한다. 시인은 그런 어정쩡한 상태를 '쓸 곳이 없다'고 단언하며 극단적인 순수성을 요구한다. '차라리 아니 타고 생나무로 있으시오'라는 구절은 시작조차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다.

 

이 시에서 사랑은 선택의 문제이며, 한번 선택했다면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신성한 의식이 된다. '재 그것조차 마저 탐이 옳으니라'는 마지막 구절은 완전한 소멸을 통한 영원성의 획득이라는 역설적인 경지를 보여준다.


🎼 난파 홍난파: 한국 서양음악의 개척자

난파(蘭坡) 홍난파(1898-1941)는 한국인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 지휘자, 음악 교육자, 평론가로서 암흑기였던 일제강점기에 서양음악의 씨앗을 뿌리고 싹을 틔운 선구자다. '한국의 슈베르트'라 불렸을 만큼 그의 음악적 재능은 시대를 앞서갔다.

🎻 '봉선화'에서 '난파트리오'까지

나라 잃은 설움을 담은 가곡 '봉선화'는 그의 이름을 민족의 가슴에 새긴 불멸의 작품이다. 그는 일본 유학을 통해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으며, 귀국 후에는 연주 활동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1933년에는 한국 최초의 실내악단인 '난파 트리오'를 결성하여 실내악이라는 장르를 국내에 처음 소개하기도 했다. 그의 활동은 단순한 음악 작업을 넘어, 척박한 땅에 서양음악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뿌리내리게 한 거대한 운동이었다.


🎶 가곡 '사랑'의 음악적 특징: D♭ Major의 열정

홍난파는 이은상의 이 격정적인 시를 어떻게 음악으로 풀어냈을까? 그는 이 곡을 내림 라장조(D♭ Major)로 작곡했다. D♭ Major는 따뜻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깊은 감정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조성이며, 낭만 시대 작곡가들이 사랑의 테마에 즐겨 사용하던 조성 중 하나다.

  • 박자: 9/8박자로 작곡되어, 큰 세 박의 흐름 속에 셋잇단음표의 리듬이 계속해서 흐르며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꽃의 일렁임을 음악적으로 형상화한다.
  • 선율: 선율은 점진적으로 상승하며 감정을 고조시킨다. 특히 '타고 다시 타서 재 될 법은 하거니와' 부분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가, '타다가 남은 동강은 쓸 곳이 없느니라'에서 급격히 하강하며 단호한 거부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 피아노 반주: 피아노 반주는 단순한 화음 제공을 넘어, 펼침화음(Arpeggio)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곡 전체에 풍성함과 극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이처럼 홍난파의 음악은 시의 내용과 완벽하게 결합하여, 듣는 이가 시어의 의미를 온몸으로 느끼게 만든다. 시와 음악이 이토록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경우는 한국 가곡사에서도 흔치 않다.


결국 가곡 '사랑'은 이은상의 철학적 시어와 홍난파의 드라마틱한 선율이 만나 이룬 기적과도 같은 작품이다. 이 노래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삶에서 모든 것을 걸고 지켜내고 싶은 '사랑'은 무엇이냐고. 그 질문 앞에 우리는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게 된다.


 

사진-만년필과 잉크 그리고 시
만년필과 잉크 그리고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