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 이야기 71🎶 | 석굴암, 다람쥐는 알고 있었을까? 토함산 고갯길의 비밀 노래 - 한국인의 애창가곡 100선

토함산의 잦은 고개를 돌고 돌아 마주하는 쪽빛 동해의 눈부심. 그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다람쥐 한 마리가 발길을 멎게 합니다. 어쩌면 그 작은 생명체는 이곳에 서린 천 년의 비밀과, 그 비밀을 품은 노래 가곡 석굴암의 존재를 먼저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 토함산 다람쥐와 눈 맞추다: 노래의 첫 소절이 시작되는 곳

모든 위대한 예술은 가장 평범한 순간의 발견에서 시작됩니다. 최재호 시인의 시심과 이수인 작곡가의 악상이 만난 가곡 석굴암 역시 경주 토함산의 한 고갯길에서 그 첫 숨을 틉니다. 이 노래는 단순히 석굴암이라는 위대한 건축물을 찬양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곳에 닿기까지의 여정, 그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생명과 풍경을 오선지 위에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 "토함산 잦은 고개 돌아보면 쪽빛 동해" - 시각적 선율의 탄생

노래의 첫 구절은 한 폭의 풍경화와 같습니다. '잦은 고개'라는 표현은 물리적인 오르막길뿐만 아니라, 천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이들이 겪었을 희로애락의 굽이길을 암시합니다. 그 고개를 돌아섰을 때 펼쳐지는 '쪽빛 동해'는 단순한 바다가 아닙니다. 그것은 고난 끝에 마주하는 희망이자, 신라의 기상이 살아 숨 쉬는 푸른 생명력의 상징입니다.

 

이수인 작곡가는 이 가사에 마치 파도가 밀려오듯 부드럽고 서정적인 멜로디를 입혔습니다. 청아한 피아노 전주가 끝나고 "토함산-"하고 첫 음이 시작될 때, 우리는 이미 토함산의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는 듯한 청량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멜로디가 아니라, 풍경이 소리로 변환되는 '공감각적 심상'의 극치라 할 수 있습니다.

🌲 "낙락한 장송등걸 다래넝쿨 휘감기고" - 시간의 흔적을 노래하다

풍경은 멀리서 가까이로, 거시에서 미시로 이동합니다. '낙락한 장송'은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켜온 역사의 증인이며, 그에 휘감긴 '다래넝쿨'은 끈질긴 생명력과 시간의 얽힘을 보여줍니다. 이 구절에서 음악은 조금 더 내밀하고 관조적인 분위기로 변합니다. 굳건한 소나무와 유연한 덩굴의 이미지를 통해, 강인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신라의 정신, 그리고 유구한 세월의 흐름을 음악적으로 형상화합니다.

 

최재호 시인의 탁월한 언어 선택은 이처럼 하나의 풍경 속에 시간과 역사의 층위를 깊이감 있게 담아냅니다. 그의 시어들은 단순한 묘사를 넘어, 그 장소가 품고 있는 무형의 가치를 일깨우는 힘을 지녔습니다.


🎶 왜 하필 '다람쥐'였을까? 천년의 고요를 깨우는 작은 생명

가곡 석굴암 1절의 화룡점정은 바로 '다람쥐'의 등장입니다. 거대한 산과 바다, 유구한 역사의 소나무를 노래하던 시선이 문득 작고 재빠른 생명체에게로 향합니다. 이 갑작스러운 시선의 전환은 노래에 생동감과 극적인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마치 정적인 풍경화에 작은 움직임을 그려 넣어 그림 전체에 생기를 돌게 하는 기법과 같습니다.

🐿️ "다람쥐 자로앞질러 발을 멎게 하여라" - 경이로움의 순간

상상해 보십시오. 숨을 헐떡이며 산길을 오르다 문득 발 앞으로 쪼르르 달려 나와 나를빤히 쳐다보는 다람쥐와 마주치는 순간을. 그 짧은 순간, 시간은 멈추고 오직 나와 작은 생명체 사이의 무언의 교감만이 존재합니다.

 

이수인 작곡가는 이 부분을 매우 재치있게 표현했습니다. 피아노 반주가 스타카토처럼 짧게 끊어지며 다람쥐의 재빠른 움직임을 묘사하고, 노래의 선율은 잠시 숨을 고르며 발걸음을 멈추는 화자의 모습을 그립니다. 이것은 단순한 음악적 기교를 넘어,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는 경이로운 합일의 순간을 포착한 것입니다.

🤫 정적과 동적의 완벽한 조화

가곡 석굴암의 1절은 '정(靜)'과 '동(動)'의 대비와 조화가 백미입니다. 토함산과 동해, 늙은 소나무라는 거대하고 정적인 배경 위에, 다람쥐라는 작고 동적인 존재를 배치함으로써 오히려 그 고요함과 장엄함은 더욱 깊어집니다.

 

다람쥐의 출현은 천년 세월의 무게에 짓눌릴 수 있는 감상자를 현실의 생동감 넘치는 순간으로 이끌어냅니다. 이는 단순한 풍경 묘사를 넘어, 과거와 현재, 장엄함과 친근함, 영원과 순간을 아우르는 깊은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습니다. 이 노래가 오랜 시간 사랑받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입체적인 구조 속에 담긴 보편적인 감동 때문일 것입니다.


🗺️ 노래 따라 걷는 길, 석굴암 순례의 첫 걸음

결국 가곡 석굴암의 1절은 석굴암 본존불을 만나러 가는 '과정' 그 자체에 대한 찬사입니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만큼이나, 그곳에 이르는 길이 얼마나 아름답고 의미 있는지를 노래합니다.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마치 내가 직접 토함산의 흙을 밟고, 쪽빛 동해의 바람을 맞으며, 다람쥐와 눈인사를 나누는 듯한 생생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 한 걸음 한 걸음에 담긴 의미

우리의 삶도 어쩌면 토함산을 오르는 길과 같을지 모릅니다. 수많은 고비를 넘고, 때로는 낙락장송처럼 굳건하게, 때로는 다래넝쿨처럼 유연하게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다 문득 만나는 작은 다람쥐 같은 일상의 소소한 기쁨들이 우리네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가곡 석굴암은 바로 그 길 위의 모든 순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위대한 목표를 향한 여정 자체가 축복임을 일깨워주는 길 위의 노래입니다.

 

토함산 고갯길에서 시작된 이 노래는 이제 막 첫 번째 문을 열었을 뿐입니다. 과연 이 길의 끝에서 우리는 무엇을 마주하게 될까요? 스러진 신라의 꿈과 차가운 이끼 속 푸른 숨결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고비 숨을 고르고 나면 비로소 넓은 한계가 펼쳐지듯, 노래는 우리를 신라 천년의 꿈이 서린 곳으로 안내합니다. 가곡 석굴암, 그 장엄한 여정의 시작은 이토록 싱그럽고 경이로운 풍경과 함께합니다.

 

사진-토함산
토함산 잦은 고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