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 이야기 72📜 | 석굴암, 신라 천년의 꿈과 본존불의 미소 [가사/해석] - 한국인의 애창가곡 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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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함산의 구불구불한 길 끝에서 마주하는 것은 단순한 돌의 동굴이 아닙니다. 그곳은 스러진 신라 천년의 꿈이 감돌고, 차가운 돌 속에서 푸른 숨결이 느껴지는 성스러운 공간입니다. 가곡 석굴암은 바로 그 공간의 본질, 눈에 보이지 않는 천년의 숨결을 소리로 담아낸 위대한 예술 작품입니다.

 


🎼 가곡 석굴암 (최재호 작시, 이수인 작곡) - 전체 가사

이 노래의 깊이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먼저 최재호 시인이 빚어낸 아름다운 노랫말 전체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각 연에 담긴 시적 이미지와 서사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작곡가 이수인이 왜 이런 선율을 붙였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됩니다.

1절
토함산 잦은 고개 돌아보면 쪽빛 동해
낙락한 장송등걸 다래넝쿨 휘감기고
다람쥐 자로앞질러 발을 멎게 하여라

2절
한 고비 또 한 고비 올라서면 넓은 한계
스러진 신라 천 년 꿈도 서려 감도는가
막달아 아늑한 여기 굴이 하나 열렸네

3절
칡뿌리 엉킨 흙을 둘러막은 십육나한
차가운 이끼 속에 푸른 숨결 들려오고
연좌에 앉으신 님은 웃음마저 좋으셔라




🏛️ "스러진 신라 천 년 꿈도 서려 감도는가" - 2절, 시간과 공간의 만남

1절이 석굴암으로 향하는 길 위의 '풍경'이었다면, 2절은 그 길의 끝에서 마주하는 '공간'과 그 안에 서린 '시간'에 대한 노래입니다. 음악은 1절의 경쾌함을 지나 한층 장엄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로 전환됩니다. 마치 사찰의 문턱을 넘어서는 듯한 경건함이 느껴집니다.

🌀 "한 고비 또 한 고비 올라서면 넓은 한계" - 육체적 여정에서 정신적 경지로

'한 고비 또 한 고비'라는 반복은 단순히 물리적인 오르막을 넘어, 깨달음을 향한 구도자의 길, 혹은 예술가의 창작 과정을 연상시킵니다.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도달한 '넓은 한계(寒溪)'는 차가운 계곡이라는 뜻을 넘어, 속세의 번뇌를 벗어던진 청정한 정신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이수인 작곡가는 이 부분에서 선율을 더 넓고 길게 확장하며, 마침내 탁 트인 공간에 도달한 해방감과 장엄함을 표현합니다. 이것은 가곡 석굴암이 단순한 서정 가곡을 넘어, 깊은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 "막달아 아늑한 여기 굴이 하나 열렸네" - 성소(聖所)의 발견

마침내 순례자는 목적지에 다다릅니다. '막달아'라는 표현은 여정의 끝을, '아늑한'이라는 형용사는 석굴암 내부의 포근하고 안정적인 분위기를 완벽하게 포착합니다. 세상의 풍파를 뒤로하고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한 공간, 그곳에 '굴이 하나 열렸네'라는 담담한 선언은 오히려 폭발적인 감동을 자아냅니다.

 

이 대목에서 음악은 다시 한번 변화합니다. 장엄함 속에서 부드러운 서정성이 되살아나며, 듣는 이를 석굴암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내부로 이끕니다. 외부 세계의 웅장함(토함산, 동해)에서 내부 세계의 아늑함(석굴)으로의 전환은 완벽한 음악적 설득력을 가집니다.

 

🎶 나의 석굴암, 나의 노래

제가 처음 이 노래를 제대로 마주한 것은 언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서툰 목소리로 "토함산 잦은 고개"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어릴 적 수학여행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안개 자욱한 새벽, 버스에서 내려 친구들과 장난치며 올랐던 그 길. 쪽빛 동해는 보지 못했지만, 축축한 흙냄새와 풀벌레 소리, 그리고 마침내 유리벽 너머로 마주했던 본존불의 고요한 미소. 그 모든 감각이 노래 한 소절 한 소절에 녹아드는 듯한 전율을 느꼈습니다.

 

가곡 석굴암은 제게 잊었던 추억을 되살려준 타임머신이자, 그저 돌부처로만 여겼던 본존불의 미소에 담긴 깊은 의미를 처음으로 헤아리게 해준 스승이었습니다.


🙏 "연좌에 앉으신 님은 웃음마저 좋으셔라" - 3절, 예술과 신앙의 절정

노래는 이제 석굴암의 핵심, 본존불과 그를 둘러싼 나한들에게로 시선을 집중합니다. 3절은 가곡 석굴암의 클라이맥스이자, 이 노래가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경지를 보여줍니다. 음악은 가장 경건하고 숭고한 분위기로 가득 차며,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듭니다.

 

🌿 "차가운 이끼 속에 푸른 숨결 들려오고" - 무생물에 깃든 생명

'칡뿌리 엉킨 흙을 둘러막은 십육나한'이라는 묘사는 석굴암이 자연과 완벽하게 조화된 인공 건축물임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차가운 이끼 속에 푸른 숨결'이라는 구절은 시적 상상력의 절정입니다. 차갑고 딱딱한 돌, 그리고 그 위에 낀 이끼라는 무생물에서 '푸른 숨결'이라는 생명력을 발견합니다. 이는 신라 석공들의 위대한 예술혼이 돌에 생명을 불어넣었음을 의미하며, 천년의 세월에도 스러지지 않는 예술의 영원성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수인 작곡가는 이 부분에서 신비롭고 명상적인 화성을 사용하여, 마치 돌이 정말로 숨을 쉬는 듯한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 "웃음마저 좋으셔라" -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절대자의 미소

마침내 시선은 연꽃 대좌 위 본존불에게 향합니다. 그리고 노래는 가장 단순하고도 가장 깊은 한마디로 끝을 맺습니다. "웃음마저 좋으셔라." 이 마지막 구절은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 토함산을 오르는 수고로움, 신라 천년의 흥망성쇠를 모두 초월하여 그 모든 것을 따뜻하게 품어 안는 절대자의 미소를 완벽하게 담아냅니다.

 

여기서의 '웃음'은 기쁨의 표현을 넘어선 자비와 연민, 그리고 깨달음의 총체입니다. 음악은 이 마지막 구절을 가장 부드럽고 따뜻한 선율로 감싸 안으며, 깊은 울림과 함께 고요히 마무리됩니다.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완전한 평화와 안식에 도달하는 순간입니다.

 

최재호의 시와 이수인의 곡이 만난 가곡 석굴암은 한 편의 완결된 드라마입니다. 여정의 시작부터 깨달음의 절정까지, 그 모든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단순한 노래 감상을 넘어 깊은 영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사진-석굴암
연좌에 앉으신 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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