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의 익숙한 선율 속에서 시작하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은 매우 특별합니다.보리밭의 감동적인 합창 경험,바리톤 솔로와 아련한 휘파람 소리에 담긴 추억에서 출발하여, 이 노래가 탄생한 1951년 전쟁의 한복판으로 가봅니다.
천재 작곡가 윤용하가 잿더미 속 부산에서 어떻게 담뱃갑 은박지 위에 기적 같은 멜로디를 그려냈는지, 그 절박하고도 위대한 순간을 추적합니다.
무대 위, 우리들의 '보리밭'이 울려 퍼질 때
조명이 어두워지고 지휘자의 손끝이 허공에서 멈추는 순간, 객석의 모든 소음이 하나의 침묵으로 응축됩니다. 이윽고, 나지막하고 구수한 바리톤 솔로가 그 침묵을 가르며 흘러나옵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제가 몸담았던 합창단에서 이 노래는 언제나 가장 연륜 깊은 선배의 몫이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단순히 악보 위의 음표가 아닌, 한평생을 살아낸 사람의 희로애락과 노래에 대한 깊은 경외심이 담겨 있었죠.
그의 목소리를 따라 우리는 황금빛 들판을 걷습니다. 간주에 이르러 한 줄기 휘파람 소리가 들려올 때면, 그것은 보리밭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되고,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향한 아련한 그리움이 됩니다.
악기처럼 완벽한 피치로 그 휘파람을 불던 한 선배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파트가 하나 되어 클라이맥스로 치달을 때,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가는 소프라노와 테너의 애드립은 듣는 이의 가슴에 뜨거운 전율을 새깁니다.
우리는 그렇게 한마음으로 노래하며, 이 아름다운 멜로디가 주는 위로와 감동에 흠뻑 젖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리는 알고 있었을까요? 우리가 부르는 이 평화로운 노래가 실은 가장 절망적인 시대의 한복판에서, 가장 처절한 방식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시간을 거슬러, 1951년 피난수도 부산으로
우리의 합창 소리를 뒤로하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도착한 곳은 1951년, 포성과 절망이 일상이 된 피난수도 부산의 어느 허름한 판잣집 다락방. 잿빛 하늘 아래, 수많은 피난민의 고단한 숨소리가 뒤섞인 이곳에 한 청년이 웅크리고 있습니다. 바로 황해도에서 피난 온 스물아홉의 천재 작곡가, 윤용하입니다.
고향을 잃고, 가족과 흩어지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 그의 손에 남은 것은 음악에 대한 꺼지지 않는 열정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손에 한 권의 낡은 시집이 들립니다. 그 안에서 그는 운명처럼 한 편의 시를 발견합니다. 바로 같은 실향민, 박화목 시인이 쓴 '보리밭'.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그 시어들은 단순한 활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두고 온 고향의 풍경이었고, 잊고 있던 흙냄새였으며, 다시는 만질 수 없을 것 같던 평화의 감각이었습니다. 시는 그의 메마른 영혼에 불을 지폈고, 그의 머릿속에서는 고향의 황금빛 물결이 넘실대는 장엄한 멜로디가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절박한 오선지, '화랑' 담뱃갑
그러나 넘치는 영감을 받아줄 오선지 한 장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한 전쟁터에서 종이는 사치였습니다. 창작의 열망과 현실의 결핍이 충돌하는 그 순간, 그는 무릎을 쳤습니다.
주머니 속에서 구겨진 담배 '화랑' 갑을 꺼내 조심스럽게 은박 포장지를 분리해 펼쳤습니다. 반짝이는 은박지 위에 연필로 다섯 개의 선을 그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절박하고도 위대한 오선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위로 그의 영감이 폭포수처럼 쏟아졌습니다. 불과 30분. 전쟁의 모든 소음을 잠재우는 아름답고 서정적인 멜로디가, 희망을 노래하는 불멸의 가곡 '보리밭'이 완성되었습니다. 절망의 상징과도 같은 피난지의 담뱃갑 위에서, 가장 찬란한 희망의 노래가 피어난 것입니다.
이 노래는 이듬해 발표회에서 처음 불렸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수많은 이들의 눈시울을 적시며 시대를 위로하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한 장의 은박지에서 시작된 우리들의 합창
다시 현재의 무대 위로 돌아옵니다. 우리가 부르는 '보리밭'의 아름다운 화음 속에는, 70여 년 전 한 작곡가가 담뱃갑 위에 새겨 넣었던 절박한 그리움과 희망이 그대로 녹아 흐르고 있습니다.
바리톤의 깊은 목소리는 그의 고뇌를, 아련한 휘파람 소리는 그의 향수를, 하늘로 뻗는 고음의 애드립은 절망 속에서도 놓지 않았던 그의 예술혼을 대변합니다. 결국 우리의 합창은 한 장의 은박지에서 시작된 기적의 메아리인 셈입니다.
'보리밭'은 그렇게 시대를 넘어, 한 사람의 아픔이 모두의 위로가 되는 예술의 위대함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가곡 이야기(6) 보리밭, 황금빛 추억의 물결 그 시작을 좇아서/한국인의 애창가곡 100선
이 글은 우리 모두의 마음속 고향 풍경 같은 노래, '보리밭'의 탄생 비화를 담고 있습니다. 1948년, 분단의 불안 속에서 시인 박화목이 고향 황해도 연백평야의 광활한 보리밭을 보며 느꼈던 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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