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검푸른 파도, 그리고 미친 듯이 울부짖는 뱃고동 소리. 한 편의 비극적인 오페라 클라이맥스를 방불케 하는 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노래, **양중해 작시, 변훈 작곡의 가곡 '떠나가는 배'**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이 노래는 단순한 이별 노래가 아닙니다. 듣는 이의 심장을 움켜쥐고 영혼까지 뒤흔드는, 슬픔의 가장 깊은 심연을 남성적인 목소리로 폭발시키는 '음악적 절규' 그 자체입니다.
🎤 왜 성악가들은 이 노래에 목숨을 거는가?
가곡 '떠나가는 배'는 한국 남성 성악가, 특히 테너들에게는 성지와도 같은 곡입니다. 이 노래를 제대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고음을 낼 수 있다는 기술적 증명을 넘어, 한 인간의 희로애락과 삶의 깊이를 표현할 수 있는 예술가라는 '훈장'과도 같습니다. 수많은 성악가들이 이 곡을 자신의 중요한 레퍼토리로 삼고, 콩쿠르나 중요한 음악회에서 비장의 무기로 꺼내 드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 영혼을 불사르는 극한의 감정 표현
이 노래는 듣는 사람뿐만 아니라 부르는 사람의 감정까지 극한으로 몰아붙입니다. "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라고 나직이 시작하는 도입부는 폭풍 전야의 고요함과 같습니다. 그러나 노래가 진행될수록 감정은 점차 고조되어, "날 바닷가에 홀 남겨두고"에 이르러서는 억눌렸던 슬픔이 활화산처럼 폭발합니다. 이 한 구절을 위해 성악가는 자신의 모든 에너지와 경험, 영혼까지 끌어모아야 합니다. 기술만으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는, 삶의 비애를 겪어본 자만이 낼 수 있는 소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 드라마틱 테너의 시금석
음악적으로도 '떠나가는 배'는 극히 높은 난도를 자랑합니다.
- 넓은 음역대: 속삭이는 듯한 저음에서부터 하늘을 찌를 듯한 고음까지, 넓은 음역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어야 합니다.
- 격정적인 다이내믹: 여리게(p) 시작해서 폭발적인 크레센도(crescendo)를 거쳐 가장 강하게(ff)까지, 감정의 파고에 따라 목소리의 크기와 색깔을 시시각각 변화시켜야 합니다.
- 폭풍 같은 반주와의 조화: 피아노 반주는 단순히 노래를 보조하는 것을 넘어, 성난 파도처럼 몰아치며 성악가와 함께 격렬한 드라마를 만들어갑니다. 가수와 반주자 간의 완벽한 호흡이 필수적입니다.
이 때문에 '떠나가는 배'는 '리리코 스핀토'나 '드라마틱 테너'와 같이 힘 있고 극적인 목소리를 가진 성악가들에게 최적화된 곡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노래를 성공적으로 연주하는 것은 자신의 기량과 예술성을 동시에 증명하는 최고의 방법인 셈입니다.
🩺 의사 가운을 입은 작곡가, 변훈의 슬픔
이처럼 강렬하고 비극적인 노래는 과연 어떤 사람의 손에서 탄생했을까요? 작곡가 변훈(卞焄, 1926-2000)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 노래의 깊은 슬픔이 결코 꾸며낸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놀랍게도 그는 평생 의사(이비인후과 전문의)로 활동하면서 작곡가의 길을 함께 걸었던, 매우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입니다.
💔 비극으로 점철된 삶, 음악으로 승화된 '한'
그의 음악 저변에는 '한(恨)'이라는 정서가 깊게 깔려 있습니다. 이는 그의 삶이 비극의 연속이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부모와 형제를 잃고, 지병으로 아내를 먼저 떠나보냈으며, 후에는 아들마저 사고로 잃는 참척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였지만, 정작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고뇌와 슬픔은 그의 음악에 고스란히 녹아들었습니다. 그의 작품 '명태', '쥐', 그리고 '떠나가는 배' 등에서 느껴지는 처절함과 비애는 바로 그의 삶 자체가 응축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태어난 절규
이 곡이 탄생한 시기는 1951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입니다. 당시 군의관으로 부산에 있던 변훈은, 이별의 장소였던 부산항에서 수많은 피난민과 징집된 병사들, 그리고 그들을 떠나보내는 가족들의 애끓는 사연을 매일같이 목격했습니다.
죽음과 이별이 일상이 된 비극적인 시대상황 속에서, 친구인 양중해 시인이 써준 이별 시는 변훈의 마음에 불을 지폈습니다. 개인의 슬픔과 시대의 아픔이 그의 내면에서 만나 '떠나가는 배'라는 거대한 음악적 폭풍으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한 개인의 이별 노래를 넘어, 전쟁의 비극을 겪은 우리 민족 전체의 울음소리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 단 한 편의 시로 불멸을 얻다, 시인 양중해
이 격정적인 음악에 영혼을 불어넣은 것은 시인 양중해(梁重海)의 강렬한 시어입니다. 그의 시는 이별의 슬픔을 미화하거나 관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슬픔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것을 "한 된 바다"라며 원망하고 "터져 나오라"고 외치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줍니다. "외로운 등대", "미친 듯이 울부짖는 고동소리" 등 감각적인 이미지는 듣는 이가 마치 비극의 현장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이처럼 '떠나가는 배'는 비극적 시대를 온몸으로 겪어낸 두 예술가, 즉 친구의 애끓는 이별 시를 가슴에 품고 있던 의사 작곡가 변훈과 자신의 슬픔을 불꽃같은 언어로 토해낸 시인 양중해의 영혼이 만나 탄생한 기적 같은 작품입니다. 단순히 슬픈 노래가 아니라,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슬픔의 최대치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술적 증언입니다.
슬픔이 어떻게 위대한 예술이 될 수 있는지, 가곡 '떠나가는 배'는 온몸으로 증명해 줍니다. 그 거대한 파도에 한번 휩쓸리고 나면, 역설적이게도 마음속 응어리가 씻겨나가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