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귀에 너무나도 익숙한 가곡 '별'의 아름다움은 작곡가 이수인의 서정적인 멜로디뿐만 아니라, 그 바탕이 된 시(詩)의 깊이에서 비롯됩니다. 이 노래의 가사는 국문학자이자 시조 시인인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 1891-1968) 선생의 대표작으로,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정경과 사색적인 깊이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은 가곡 '별'의 가사 전문을 자세히 음미하며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탐색해 보겠습니다.
📖 이병기 作, 시조 '별' 가사 전문
가곡 '별'의 가사는 이병기 시인이 지은 현대 시조입니다. 노래로 불리며 일부 반복되기도 하지만, 원 시조의 형태와 내용을 온전히 감상하는 것은 곡의 이해를 더욱 풍부하게 합니다.
별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앞에 나섰더니
서산(西山)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달이 별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 어느게요
잠자코 홀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 시대의 스승, 가람 이병기 시인의 삶과 문학
가곡 '별'의 가사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작시가 가람 이병기라는 인물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단순히 아름다운 시를 쓴 시인을 넘어, 일제강점기라는 암흑기 속에서 우리말과 글, 그리고 전통문학의 자존심을 지켜낸 굳건한 선비이자 학자였습니다.
🌱 격동의 시대를 관통한 선비 정신
1891년 전라북도 익산에서 태어난 가람은 한학을 공부하며 전통적인 소양을 쌓은 뒤, 근대 학문을 익히며 신구 학문의 조화를 이룬 지식인이었습니다. 특히 주시경 선생에게서 조선어 강의를 들으며 우리말과 글의 소중함에 눈을 떴습니다.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선비 정신'과 '지조'였습니다.
- 조선어학회 사건: 1942년, 일제가 우리말 연구와 사용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1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는 우리말을 지키려 했던 그의 신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 창씨개명 거부: 일제가 강요했던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며 민족적 자존심을 지켰습니다.
- 후학 양성: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와 중앙대학교 등에서 국문학을 가르치며 후학 양성에 힘썼고, 우리 문학 연구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그의 호인 '가람'은 '강'을 뜻하는 순우리말로, 온갖 샘물이 모여 강을 이루고 바다로 나아가듯 학문과 인격을 쌓아가겠다는 그의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꼿꼿한 삶의 태도는 그의 시 세계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화려함보다는 단정하고 소박하며 기품 있는 작품들을 탄생시켰습니다.
📜 현대 시조의 개척자
가람은 잊혀가던 '시조'라는 전통 양식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는 시조가 단순히 옛사람들의 노래가 아니라, 현대인의 감정과 사상을 담을 수 있는 살아있는 문학 형식임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시조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집니다.
- 평이하고 담백한 시어 사용: 어려운 한자어나 관념적인 표현 대신, 일상에서 사용하는 쉽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시를 썼습니다.
- 자연과의 교감: 그의 시에는 난초, 매화, 별, 달 등 자연물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는 자연을 관조하며 그 속에서 삶의 이치와 아름다움을 발견했습니다.
- 절제된 감정 표현: 슬픔이나 기쁨 등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 객관적인 풍경 묘사를 통해 은은하게 드러내는 고도의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시조 '별'은 바로 이러한 가람 시 세계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서늘한 가을밤, 뜰에 나와 하늘을 보는 지극히 평범한 행위를 통해 우주와 나 자신에 대한 깊은 사색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군더더기 없이 담겨 있습니다.
🌙 '초사흘달'에 숨겨진 비밀: 아는 만큼 보이는 시의 깊이
가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시어는 단연 '산뜻한 초사흘달'일 것입니다. 이 한 구절에는 단순한 달의 묘사를 넘어선 깊은 의미와 상징이 담겨 있습니다.
🧐 초사흘달이란 무엇인가?
초사흘달은 음력 매월 3일 저녁에 서쪽 하늘에 잠시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지는 눈썹 모양의 가느다란 달을 말합니다. 해가 지고 난 직후 잠깐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부지런하고 주의 깊은 사람만이 볼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초사흘 달은 잰 며느리가 본다."
이 속담은 초사흘달이 얼마나 보기 힘든지, 그리고 그만큼 귀하고 소중한 존재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시인은 많고 많은 달 중에서 바로 이 '초사흘달'을 선택함으로써, 그 순간의 섬세하고 귀한 아름다움을 포착해 냈습니다. '산뜻한'이라는 수식어는 막 구름을 벗어난 달의 맑고 깨끗한 이미지를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 시적 공간과 시간의 확장
첫 연에서 시인은 '바람이 서늘한' 저녁, '뜰'이라는 개인적인 공간에서 '서산머리'라는 먼 풍경을 바라봅니다. 이때 '초사흘달'과 '별'이 함께 등장하며 시적 공간은 고요한 지상에서 아득한 우주로 확장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연으로 넘어가면서 이 확장은 더욱 심화됩니다.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잠깐 얼굴을 보였던 귀한 손님, 초사흘달은 금세 서산 너머로 자취를 감춥니다. 시간의 흐름을 암시하는 이 구절은 찰나적인 아름다움의 소멸과 그로 인한 여운을 남깁니다. 달이 사라진 하늘에는 이제 무수한 별들만이 영원처럼 반짝입니다. 찰나(달)와 영원(별)의 대비가 선명합니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 어느게요 / 잠자코 홀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이제 시인의 시선은 하늘의 별에서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향합니다. 무한한 우주 속에서 '나의 별'을 찾는 행위는, 곧 '나는 누구인가', '나의 운명은 무엇인가'를 묻는 철학적 사색으로 이어집니다. '잠자코 홀로 서서'라는 마지막 구절은 이러한 고독한 성찰의 시간을 오롯이 보여주며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한 편의 시조 안에서 개인적 공간(뜰) → 우주적 공간(하늘) → 철학적 내면세계로 점층적으로 심화되는 구조는 실로 감탄을 자아냅니다.
이처럼 이병기 시인의 '별'*은 단순한 서정시가 아닙니다. 자연 현상에 대한 섬세한 관찰을 바탕으로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사색까지 담아낸, 짧지만 무한한 깊이를 지닌 걸작입니다. 작곡가 이수인 역시 이 시가 가진 깊이를 꿰뚫어 보았기에, 그저 아름답기만 한 곡이 아닌, 우리 마음에 깊은 사색과 위로를 주는 불멸의 가곡 '별'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