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곡 이야기 66 떠나가는 배 | '한(恨)이 된 바다' 가사 전문 분석: 의사 변훈과 시인 양중해, 비극의 시대가 낳은 걸작 | 한국인의 애창가곡 100선

가곡 '떠나가는 배'가 주는 강렬한 충격의 근원은 작곡가 변훈의 드라마틱한 선율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 음악에 피와 살을 부여하고 영혼을 불어넣은 것은 바로 시인 양중해의 처절한 노랫말입니다. 오늘은 이 노래의 가사 전문을 한 구절 한 구절 곱씹어보며, 그 안에 담긴 '한(恨)'의 정서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리고 이 시를 쓴 시인과 곡을 붙인 작곡가의 운명적인 만남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해 보겠습니다.

사진-파도
저 푸른 물결 외치는

 

📄 양중해 作, '떠나가는 배' 가사 전문

이별의 슬픔을 이토록 격정적이고 남성적인 어조로 노래한 시는 한국 가곡의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시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체념이나 관조가 아닌, 슬픔에 대한 정면 돌파와 원망, 그리고 절규입니다.

떠나가는 배

- 양중해 작시, 변훈 작곡


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오 떠나는 배.

내 영원히 잊지 못할 임 실은 저 배는 야속하리.

날 바닷가에 홀 남겨두고, 기어이 가고야 마느냐.


터져 나오라 애슬픔, 물결 위로, 오 한(恨) 된 바다.

아담한 꿈이 푸른 물에 애이 사라져, 내 홀로

외로운 등대와 더불어 수심 뜬 바다를 지키련다.


저 수평선을 향하여 떠나가는 배, 오 설운 이별.

임 보내는 바닷가를 넋없이 거닐면, 미친 듯이

울부짖는 고동소리, 임이여 가고야 마느냐.

💔 '한(恨)이 된 바다', 비극이 낳은 두 예술가

이 시와 노래의 핵심 키워드는 단연 '한(恨)'입니다. 이는 단순한 슬픔이나 원망을 넘어, 가슴속에 응어리져 풀리지 않는 깊은 슬픔과 억울함을 의미하는 한국 고유의 정서입니다. 이 '한'이라는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곡가 변훈과 작시가 양중해, 두 사람의 삶과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 작곡가 변훈: 비극을 껴안고 살았던 의사

작곡가 변훈(1926-2000)의 삶은 그 자체가 한 편의 비극 드라마였습니다. 그는 함흥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서 유학한 엘리트 의학도였지만, 그의 삶은 연이은 상실의 연속이었습니다.

  • 연이은 가족의 죽음: 청년 시절 부모님과 형제를 잃었고, 결혼 후에는 사랑하는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재혼하여 가정을 꾸렸지만, 장성한 큰아들을 교통사고로 잃는 참척의 고통까지 겪어야 했습니다.
  • 의사로서의 고뇌: 그는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사였지만, 정작 가장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깊은 무력감과 슬픔에 시달렸습니다. 그의 음악에 나타나는 처절함은 바로 이러한 개인적인 비극에서 비롯된 진실한 감정의 표출이었습니다.
  • 한국전쟁의 목격자: 1951년, 이 곡을 작곡할 당시 그는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임시수도였던 부산항은 수많은 이산과 이별이 벌어지는 비극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그의 개인적인 '한'을 민족 전체의 '한'으로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변훈에게 작곡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의술로도 치유할 수 없는, 자기 내면의 깊은 상처와 슬픔을 토해내고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습니다.

🤝 양중해 시인과의 운명적 만남

시인 양중해는 변훈과 일본 유학 시절을 함께 보낸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언론인이자 시인이었던 양중해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가슴 아픈 이별을 겪은 뒤, 그 슬픔을 담아 시 '떠나가는 배'를 썼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 줄 친구 변훈에게 이 시를 건넸습니다.

변훈은 친구의 시를 받아들고 한동안 작곡을 하지 못했습니다. 시에 담긴 슬픔이 너무나도 강렬하고 자신에게도 아픈 기억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비극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마침내 곡을 쓸 결심을 합니다. 친구의 개인적인 이별의 아픔이, 전쟁으로 인해 생이별을 겪는 수많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슬픔과 공명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양중해의 시는 변훈의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던 모든 '한'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었고, 그렇게 불멸의 명곡 '떠나가는 배'가 탄생한 것입니다.

 

🌊 가사 심층 분석: 시어에 담긴 절망과 의지

이 시는 이별의 상황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3단계로 나누어, 감정의 심화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1️⃣ 제1연: 이별의 현실과 원망

"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오 떠나는 배."
노래는 '푸른 물결'과 '거센 바다'라는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를 동시에 제시하며 시작됩니다. 희망을 상징할 수도 있는 '푸른'색은 '외치는', '거센'이라는 수식어와 결합하여 오히려 잔인하고 위협적인 존재로 변모합니다. 화자의 슬픔을 아랑곳하지 않고 임을 실어 떠나는 자연에 대한 원망이 담겨있습니다. "야속하리", "기어이 가고야 마느냐"라는 직설적인 표현은 슬픔을 억누르지 않고 그대로 표출하는 남성적인 어조를 보여줍니다.

2️⃣ 제2연: 슬픔의 폭발과 '한'이 된 바다

"터져 나오라 애슬픔, 물결 위로, 오 한(恨) 된 바다."
이 노래의 주제 의식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구절입니다. 화자는 더 이상 슬픔을 안으로 삭이지 않고 "터져 나오라"고 명령합니다. 자신의 슬픔이 바다 전체를 뒤덮어, 바다 그 자체가 자신의 '한'이 되어버렸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자연과 화자의 감정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비극적 경지입니다. "아담한 꿈"이 "푸른 물"에 사라지는 허망함,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외로운 등대"와 함께 "수심 뜬 바다를 지키는" 일뿐이라는 체념 섞인 다짐은 절망의 깊이를 더합니다.

3️⃣ 제3연: 절규와 미완의 이별

"미친 듯이 울부짖는 고동소리, 임이여 가고야 마느냐."
배는 이미 "수평선"을 향해 떠나가고, 화자는 "넋없이" 바닷가를 거닙니다. 이때 들려오는 "미친 듯이 울부짖는 고동소리"는 떠나는 배가 내는 소리이자, 차마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화자의 내면의 절규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에 반복되는 "임이여 가고야 마느냐"라는 외침은 대답 없는 질문입니다. 이별은 이미 이루어졌지만, 화자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이 끝없는 질문은 이별이 결코 끝나지 않았으며, 그의 '한'이 영원히 계속될 것임을 암시하며 노래를 끝맺습니다.

 

결국 가곡 '떠나가는 배'는 한 편의 시와 한 편의 노래를 넘어, 개인의 비극과 시대의 아픔이 만나 탄생한 우리 민족의 '한'에 대한 가장 위대한 예술적 증언 중 하나입니다. 변훈과 양중해, 두 예술가의 영혼이 빚어낸 이 절절한 외침은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심장을 뜨겁게 울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