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 이야기 10 비목, 초연 쓸고 간 계곡에 울려 퍼진 진혼곡/한국인의 애창가곡 100선

한 청년 장교의 가슴 아픈 발견으로 태어난 시 '비목'은 어떻게 전 국민의 마음을 울리는 장엄한 노래가 되었을까요?

 

이 글은 작사가 한명희와 작곡가 장일남의 운명적 만남, 그리고 슬픔을 머금으면서도 숭고함을 잃지 않는 '비목'의 멜로디가 탄생하는 과정을 따라갑니다.

 

또한, '궁노루'와 '달빛' 등 시어에 담긴 상징적 의미를 깊이 있게 분석하며 '비목'이 단순한 전쟁 가요를 넘어, 모든 스러져간 젊음을 위한 위대한 진혼곡으로 자리 잡게 된 이유를 탐구합니다.

비바람 긴 세월도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들어가며: 시, 운명의 멜로디를 만나다

 

지난 이야기에서 우리는 '비목'이 단순한 나무 이름이 아닌, 이름 없이 스러져간 용사의 무덤가에 세워진 '나무 비석'이라는 사실과, 그 뒤에 숨겨진 한 청년 장교의 가슴 아픈 사연을 살펴보았습니다.

 

1964년 강원도 화천의 비무장지대에서 탄생한 이 슬픈 시는 한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조용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위대한 예술이 그렇듯, 이 시 역시 자신을 알아봐 줄 운명의 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이 비장한 시가 어떻게 한국 가곡의 거장, 작곡가 장일남 선생을 만나 우리 모두의 가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슬프고도 숭고한 멜로디를 얻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방송사 복도에서의 우연, 그리고 거장의 선택

 

시간은 흘러 1960년대 후반, 한명희 선생은 동양방송(TBC)의 PD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TBC에서는 '가곡의 밤'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가곡을 발굴하는 데 힘쓰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명희 PD는 자신이 과거에 썼던 시 '비목'을 떠올렸고, 가곡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이 시를 들고 작곡가들을 물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띈 인물이 바로 당대 최고의 작곡가로 손꼽히던 장일남(張日男, 1932~2006) 선생이었습니다.


한명희 PD는 방송사 복도에서 마주친 장일남 작곡가에게 조심스럽게 자신의 시를 건넸습니다. 시를 읽어 내려가던 장일남 작곡가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고, 깊은 침묵에 빠졌다고 합니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녘에..." 시어 하나하나가 품고 있는 비극적인 서사와 선명한 이미지는 거장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습니다. 장일남 작곡가는 그 자리에서 즉시 작곡을 결심했고, 며칠 만에 우리가 아는 '비목'의 불후의 멜로디를 완성해냈습니다.

 

이 곡은 1969년 TBC를 통해 처음으로 방송되었고, 그 즉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슬픔을 머금은 장엄함, 멜로디의 비밀

 

장일남 작곡가는 '비목'의 시가 가진 비장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느리고 장중한 템포를 사용했습니다. 곡은 마치 장례식의 진혼곡처럼 시작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감정이 점차 고조되며 웅장한 오케스트레이션과 함께 터져 나옵니다.

 

이는 단순히 한 병사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을 넘어, 전쟁이라는 거대한 비극에 희생된 모든 젊음의 넋을 기리고 그 숭고한 희생을 추모하는 듯한 효과를 줍니다.

 

선율은 비통하지만 결코 감상에만 빠지지 않으며, 비극 속에서도 숭고함과 장엄함을 잃지 않는 품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절묘한 균형 감각이야말로 장일남 작곡가가 빚어낸 '비목' 멜로디의 위대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궁노루와 달빛, 자연이 건네는 위로

 

'비목'의 가사는 비극적인 현실과 그를 감싸는 서정적인 자연의 대비를 통해 슬픔을 더욱 깊게 만듭니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흐르는 밤." 여기서 '궁노루'는 전쟁의 상흔으로 두려움에 떠는 연약한 생명체이자, 외롭게 잠든 무명용사의 영혼을 상징합니다. 산울림을 타고 흐르는 달빛은 이 외로운 영혼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자연의 위로입니다.

 

인간이 만든 비극의 현장 위로, 말없이 흐르는 달빛과 스쳐 지나가는 노루의 울음소리는 전쟁의 참상과 허무함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모든 것을 품어주는 대자연의 섭리를 통해 역설적인 평화와 안식을 느끼게 합니다.

 

이 한 줄의 가사만으로도 '비목'은 단순한 전쟁 가요를 넘어, 철학적 깊이를 지닌 한 편의 서사시가 됩니다.

 

한 편의 시와 한 편의 곡이 만나 이토록 완벽한 하나의 생명체를 이룬 '비목'. 이 노래는 전쟁의 포화가 멎은 자리에 피어난 진혼의 꽃이자, 스러져간 모든 젊은 영혼에게 바치는 우리 모두의 숭고한 헌사입니다.


2025.07.02 - [분류 전체보기] - 가곡 이야기(9) 비목, 혹시 '나무 이름'으로 알고 계셨나요?/한국인의 애창가곡 100선

 

가곡 이야기(9) 비목, 혹시 '나무 이름'으로 알고 계셨나요?/한국인의 애창가곡 100선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가곡 '비목'. 하지만 그 제목의 진짜 의미를 알고 계신가요? 이 글은 오랫동안 '비목'을 주목 같은 멋진 나무 이름으로 오해했던 저의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196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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