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부를 수 없을 것 같던 노래 '향수'. 모두가 포기하려던 순간, 작곡가 김희갑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친 아이디어 하나가 한국 가요계의 역사를 바꿔놓았습니다. "같이 부르면 되잖아!"
클래식 성악과 교수님과 부드러운 포크 가수의 듀엣, 상상이나 해보셨나요? 이 말도 안 되는 조합이 어떻게 전설을 만들었는지, 그 감동의 피날레를 함께 하시죠.
"이걸 누가 불러?" 난리 난 클라이맥스
작곡가 김희갑이 만든 '향수'의 클라이맥스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습니다. 일반적인 대중가수가 소화하기에는 음이 너무 높고, 엄청난 성량과 성악적인 발성을 필요로 했죠. 노래를 의뢰했던 가수 이동원조차 이 부분을 소화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노래를 만들어놓고도 부를 수가 없다니!" 프로젝트가 좌초될 위기에 처한 순간이었습니다. 녹음실의 모두가 깊은 시름에 빠져있을 때, 김희갑 작곡가가 무릎을 '탁' 치며 외쳤습니다. 바로 그의 번뜩이는 '신의 한 수'가 나온 것입니다.
김희갑의 신의 한 수, "성악가랑 같이 부르죠!"
"이동원 씨가 서정적인 부분을 부르고, 클라이맥스는 성악가에게 맡깁시다!" 지금이야 크로스오버가 흔하지만, 당시만 해도 대중가요에 클래식 성악가가 참여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파격이었습니다.
클래식은 '고급 예술', 대중가요는 '그보다 아래'라는 편견이 팽배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죠.
김희갑은 곧장 서울대학교 음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테너 박인수를 찾아갑니다. 대중가요 녹음에 참여해달라는 제안에 박인수 교수는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김희갑은 포기하지 않고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벽을 한번 허물어봅시다"라며 끈질기게 설득했습니다.
"테너들의 로망이자 악몽"
결국 박인수 교수는 '향수'의 악보를 보고 그 예술성에 감탄해 역사적인 도전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의 폭발적인 고음이 더해진 '향수'는 그야말로 완벽 그 자체였죠.
특히 테너라면 누구나 박인수 교수님이 맡은 그 시원한 고음을 멋지게 소화해보고 싶은 로망을 갖게 될 겁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여러 무대에서 이 곡의 높은 파트를 맡아 노래하며 짜릿한 희열을 느끼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해 나이가 들수록 그 부분이 점점 힘에 부치는 것을 느낍니다. 때로는 저보다 훨씬 더 편안하고 멋지게 이 부분을 소화하는 친구들을 보며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부러움은 곧 함께 노래할 수 있다는 즐거움과, 이 위대한 곡을 부를 수 있다는 감사함으로 바뀝니다. '향수'는 그렇게 우리 모두에게 도전이자, 함께 완성해나가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클래식과 대중가요의 벽, 와르르 무너지다
1989년, 마침내 발표된 이동원, 박인수의 '향수'는 대한민국 전체를 뒤흔들었습니다. 포크의 서정성과 클래식의 웅장함이 완벽하게 결합된 이 노래는 모든 세대와 계층의 마음을 사로잡았죠.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을 증명하듯, 이 노래는 클래식과 대중음악이라는 장르의 벽을 완벽하게 허물어버린 위대한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히트곡을 넘어, 한국 대중음악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기념비적인 명곡으로 평가받는 이유입니다.
한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들의 용기 있는 도전과 파격적인 만남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쩌면 이토록 가슴 벅찬 '향수'를 결코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들의 위대한 만남에 다시 한번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가곡 이야기(18) 향수: 이걸 노래로 만든다고? 다들 고개만 절레절레 / 한국인의 애창가곡 100선
정지용의 완벽한 시 '향수'를 노래로 만들겠다는 꿈을 꾼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건 불가능해!"라는 차가운 거절뿐. 한국 가요계의 판도를 바꾼 명곡 '향수'의 탄생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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