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금 부르는 '그리운 금강산'이 사실 한번 가사가 바뀌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1972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이 노래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작사가가 직접 눈물로 가사를 고쳐 써야만 했던 가슴 아픈 사연, 그리고 그 속에 담긴 통일을 향한 더 간절해진 염원을 따라가 봅니다.
'통일의 노래'가 된 결정적 순간
1961년에 처음 발표된 '그리운 금강산'은 실향민들의 큰 사랑을 받았지만, 본격적으로 '분단과 통일의 상징곡'이 된 계기는 바로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 이후 시작된 '남북적십자회담'과 '이산가족 상봉'이었습니다.
수십 년 만에 혈육을 만나는 이산가족들의 오열과 통곡이 연일 TV와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고, 이때 배경음악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곡이 바로 '그리운 금강산'이었습니다.
온 국민이 이 노래를 들으며 함께 울고 웃었고, 노래는 분단 현실의 비극을 가장 절절하게 대변하는 국민적인 테마송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작사가의 눈물, "가사를 고쳐야겠다"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TV로 지켜보던 작사가 한상억의 마음은 무겁고 착잡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노래가 이토록 큰 사랑을 받는 것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시대의 아픔을 더 깊이 담아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그는 "내 노래가 민족의 아픔을 위로하기엔 아직 부족하다"라고 생각했죠. 특히 '더럽힌 지 몇 해'라는 원래 가사가 북측을 자극할 수 있다는 정치적 고려와 함께, 이념적 대립보다는 민족의 순수한 염원을 담고 싶다는 예술가적 고뇌에 빠졌습니다.
결국 그는 더 큰 시대정신을 담기 위해, 직접 자신의 가사를 수정하기로 결심합니다.
어떻게 바뀌었을까? '원망'에서 '염원'으로
개정된 가사는 미묘하지만 매우 중요한 변화를 담고 있습니다.
우선 후렴구의 '더럽힌 지 몇몇 해'를 '못 가본 지 몇몇 해'로 바꾸었습니다.
'더럽혔다'는 표현은 적대감과 원망의 감정이 담겨있지만, '못 가봤다'는 표현은 순수하게 갈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담고 있습니다. 이념적 대립을 넘어, 순수한 인도주의적 염원으로 가사의 결을 바꾼 것입니다.
또한, 2절의 '짓밟힌 자리'를 '예대로 인가'로 '우리다 맺힌 원한'을 '우리다 맺힌 슬픔'으로 바꾸었습니다.
새 옷을 입고, 불멸의 노래가 되다
이렇게 새롭게 태어난 '그리운 금강산'은 국민들의 마음에 더욱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시대의 아픔을 끌어안고 함께 호흡하며 진화한 노래는 더욱 큰 생명력을 얻게 된 것이죠.
바뀐 가사는 이후 모든 교과서와 악보에 실리게 되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개정된 버전의 '그리운 금강산'을 배우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노래는 이제 단순히 아름다운 산을 그리는 노래가 아니라, 남북 이산의 아픔과 통일을 향한 민족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역사의 기록'이자 '평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한 편의 시가 시대의 아픔과 만나 어떻게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더 위대한 노래로 거듭나는지, '그리운 금강산'의 개사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울림을 선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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